2015-06-07 일요일

나는 당신에 관해 무엇이든 쓸 수 있다. 그저께 금요일에 스터디를 어정쩡하게 마치고, 비가 왔었다는 핑계로 사람들은 파전에 막걸리를 먹으러 갔다. 나는 양재역에 정확히 밤 열시에 도착했다. 어지러운 네온 사인을 보고 나는 타인의 행복을 재단했다. 내부 수리 중이라는 돌이켜 보면 덱스터를 위해 차려진 공간이었던 디비디 방을 뒤로하고,넓은 길을 따라 남한산성에 갔다. 내부 관리인 한 분과 몇몇 다른 무리들을 마주치긴 했지만 산책 중엔 아니었다. 근사한 산책이었다. 실루엣만 보이는 어두운 길을 지나 성곽 너머 뚜렷한 도시의 밤을 구경했다. 아저씨에겐 어떻게 기억될지 모르지만, 나는 바람과 졸병체험, 1도 비슷하지 않은 부엉이 흉내,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이 달을 가렸다 보여주던 장면, 갑자기 향수를 많이 쓰는 애인에 관한 노래를 기억한다. 차에서 바보흉내를 내 줘서 나는 깔깔 웃었다. 맥주랑 라면을 먹었다. 네 명의 건축가가 쓴 건축학개론 이라는 아름다운 책을 발견했다. 설잠을 잤다. 나는 제일 쎈 것을 하고 나머지는 삼갔다. 자꾸 치남이의 전형인 질문아닌 질문들을 해서 나는 불쾌하다고 말했다.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를 삼분의 일 정도 읽었다. 계란후라이와 함께 나오는 제육볶음을 먹고 헤어졌다. 집에 오는 버스에서 이렇게 균형이 맞지 않는 관계들에서 벗어나려면 빨리 독립해야 겠다는 다짐을 또 했다. 내 힘을 기르는 것. 국주도서관 앞에서 사고가 나서 팔번 버스가 멈췄고 어쩔 수 없이 집까지 걸어왔다. 씻고, 팩 하고, 커뮤니티 보고, 열시까지 잠 잤다. 아빠는 나에게 삼계탕을 사주고 싶어했다. 나는 공손히 거절했다. 부쩍 표현을 많이 하시려고 노력하는 아빠가 고맙다. 열시에 일어나 다른 팩을 또 하고, 오규원 시집을 읽고 세 편 필사했다. 잠들기 전 조명 아래서 생각에 관한 생각 조금 읽다 잤다.

이렇게 금요일과 토요일은 단절되지 않은 하루였다.

일요일 열두시에 일어났다. 동호랑 지형이랑 계란에 밥을 먹고, 나는 물세수만 하고 선크림 바르고 챙이 커다란 모자 쓰고, 하제랑 지형이랑 산책 갔다. 아스팔트 길만 걸어서 하제에게는 산책 보다는 고통의 길이었을 것 같아 미안하다. 지형이가 볼 만화책 세 권을 빌리고 지형이가 마실 포카리스웨트와 나의 캔커피를 샀다. 하제는 집에서 발을 닦아주고 얼음 두 개를 제공해준 후 우리는 솔숲에 갔다. 두시부터 두시 오십사분까지 있었다. 내 시선이 직선으로 닿는 자리에 해를 아름답게 비추는 소나무 기둥이 있었다.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 나오는 탄광 이야기를 읽었다. 그때 당신의 아버지가, 그 장례식이, 그 겨울의 남은 치킨과 혼자 기다리던 일주일이, 한 번에 떠올라서 나는 매우 울었다. 그리고 당신에 관해 무엇이든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눈물을 줄줄 흘리자 옆 자리에 앉은 지형이가 이어폰 한 쪽을 마저 주고 부채도 건네주었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그 이야기가 얼마나 슬프길래 그렇게 울었냐 물었다. 나는, 이야기 자체로도 슬프지만, 나의 개인적인 기억들과 결부되어 올라온 감정들이 강렬했다 말했다. 그러지 지형이가 언니 강제 노동에 징집된적 있느냐고, 혹시 김장 노동이 아니었냐고 되물었다. 나는 웃었다. 덕분에 웃었다. 집에 돌아와 동호랑 셋이 비빔면을 먹었다. 그리고 산 안드레아스가 아닌 상 도동에 대해 말해줬다. 가족들이 있어서 다행인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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